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무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참으로 예술에 대한 이해도와 사랑은 높은 것이 확실하다. 특히 성악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잠깐음악과 연기등을 통해서 감동을 받을때도 있지만 보통 목소리를 통해서 받는 경우가 많다.
오페라의 경우도 작품의 전반적인 것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소프라노, 테너의 아리아 중 높은 고음에서 ‘브라보’라고 외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편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던 성악가들이 귀국해서 국내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관람객들의 기호에 맞추자니 목에 무리가 가고 본인을 생각하자니 그렇고 그런 가수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괴리에서 최후의 선택은 본인 몫이지만 호평을 받기 위해 무리를 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한국의 성악가는 귀국하고 5년이 꽃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예술가곡이라고 하면 단연 그 첫머리에 독일가곡을 이야기한다. 구, 동독출신으로 투명하고 맑은 음색의 소유자로 세계적으로 정평이난 대가가 바로 테너 피터 슈라이어다. 이분을 2005년 11월 대구로 초청을 했다. 아마도 아직까지도 오페라하우스 개관이래 무대에 오른 음악가중 이분보다 유명한 음악가는 없을것이다. 2003년 이전부터 곧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조마조마 했었는데 다행히 2004년 몇 해 동안 파트너 쉽으로 일을 했던 외국의 메이저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뒤돌아 생각해 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번에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는데, 무조건 go 였다.
학교 다닐때 음악책에서나 듣던 이름인데 콘서트 프로듀서로서 어떻게 놓칠수 있겠는가. 파트너에게 연락을 해서 당장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마침 서울에서도 초청하겠다고 했고 여러모로 좋은 기회인것 같았다.
하루 하루 날자는 다가와 마침내 서울 연주회 날이 되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 나의 외국인 파트너에게 연락이 와서는 피터 슈라이어가 서울 연주 마치고 대구에 안내려가고 당일 날 공연장으로 바로 내려가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의 나이가 얼마인가? 몇 일을 쉬고 연주회를 해도 힘든 나이인데 당일 날 이동해서.....오! 주여. 이것은 절대 안 될 일이라고 길길이 날 뛰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연주자가 내 눈 앞에 없는 상황을 어떻게 믿고 일을 진행하라는 말이냐,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아느냐, 후원해 주시는 분들은 어떻게 하느냐 등등 또 지방이라는 아픔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외국 연주자들은 대구 모른다. 안다고 해도 아주 시골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만 아는 것이다. 마침내 계약 위반이라는 말까지 해가며 대구로 내려오면 당신은 무조건 좋아질 것이다. 내가 확신한다며 바로 다음날 내려오라고 했다. 정말 어렵게 동의를 받아내고 나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세계적인 대가에 대한 예우로 당시 국내에 한 대밖에 없다는 독일제 아우디 A8을 한영모터스를 통해 의전차량으로 준비해 두었고, 호텔도 막 리모델링이 끝난 대구호텔 스위트에 다시 커튼 바꾸고 가습기 몇 대 설치하고 평상시 이분이 즐기는 간식꺼리와 식사 종류, 하다못해 식수까지, 또 피아노 설치하여 연습실 만들고 이런 노력들을 왜 했는데, 대구는 서울보다 더 연주자에 대한 배려가 있고 연주회를 사랑하는 많은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는데 그렇게 함으로 이들을 통해 대구를 알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너무나 고생해 주신 한영모터스와 대구호텔에 지면을 통해서나마 뒤늦게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이에 따른 후속 조치로 언론 인터뷰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정을 다 취소했다. 필자도 성악을 했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슈라이어가 대구로 바로 오기힘들다고 한 것은 피지컬 컨디션 때문 인 것이다. 동대구역에 도착 하시자마자 바로 호텔로 이동하여 가장 편안하게 무조건 쉬시라고 했다. 그 누구도 방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편안하게 쉬고 잠자고.
그렇게 하루를 쉬고 나서야 슈라이어를 다시 만났다. 일단 자기가 생각했던것 보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했다. 극장을 보고 싶다고 하여 오페라 하우스를 가는데 대략 15분정도. 이 양반 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한 시간이상을 차를 타고 이동했단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무대를 보더니 좋단다. 당일 날 오후에 와서 리허설 하고 공연하겠다고 의견을 이야기 하시길래 필자는 안된다고 했다. 리허설은 무조건 오전에 해야하고 호텔로 돌아가 푹 쉬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호텔로 돌아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헤어져 돌아왔다.
드디어 공연 당일. 아침에 만난 슈라이어. 기분도 좋아 보이고 얼굴도 처음에 올 때보다 광택도 나는 것을 보니 필자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리허설을 하는데 확신은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슈라이어도 나에게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는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는것이 가장 좋은지도 물어왔다. 정성을 다했다. 즐겁게 리허설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 잠을 자겠다고 하길래 공연 4시간 전에 깨워드리겠다고 하고 커피 숖에서 기다렸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슈라이어와 늦게 오시는 관람객들을 위해 겨울 나그네 전곡 중 두 번의 물 마시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었는데, 이 양반 첫 곡부터 시작해 마지막 곡까지 쉬지 않고 불렀다. 4번째 곡을 마치고 사인을 보내오기를 계속 이어서 연주 할테니 관람객을 중간 중간 입장 시키라는 것이다. 감동의 물결, 이 시대 최고의 대가가 들려주는 음악에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몰입된 객석.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주회를 마치고 나니 다들 로비에서 모여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분들게 죄송했다는 말씀을 이 지면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당시 슈라이어가 얼마나 진심으로 열정을 다했는지 무대를 내려와서는 비틀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뒷문을 통해 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이분 돌아가시는 길에 파트너를 통해 메시지를 남겼다. 근래 몇 년동안 이렇게 좋은 컨디션과 기분으로 무대에 서 본적이 없었다고....
여기에서 보자. 만약 이 세계적인 대가가 욕심을 내서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아리아를 이 무대에서 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연주시간 끝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성악가는 자신의 목소리 색과 음역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그 영역의 구분을 잘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자신의 최고의 기량을 관람객들에게 선사하여 감동을 줄 수 있고 오래 동안 무대에서 활동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실력있는 콘서트 프로듀스들을 많이 양성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필자는 이런 꿈을 꾸려고 한다. 언젠가 오페라하우스에서 하얗게 연륜이 쌓인 편안한 모습의 또 다른 제2의 피터 슈라이어의 무대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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