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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교회 전도사님이셨던 故공덕귀 여사  
작성자 최경수 (122.♡.88.235) 작성일 09-06-16 20:37 조회 3,927 댓글 0
 

황금동교회 / 사진자료실

공덕귀는 1911년 4월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씨와 방말선(공마리아)씨의 5녀 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35세에 혼자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에게는 용감하고 자랑스런 어머니였다. 공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호주 선교사들과 성경 공부나 찬송을 배우는 등 교류가 많았으며 동네 여인들은 그의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일이 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서 일생 주님을 위해 일했다. 공덕귀는 믿음의 여장부인 어머니의 뒤를 밟으며 호주선교회와 더불어 학창시절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방미인 최우등생

그는 별난 데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호주 선교사는 그에게 늘 좋은 멘토였다. 공덕귀는 유치원 조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 선생을 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21살의 늦은 나이에 호주 선교부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원했던 미션스쿨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으로 ‘만 가지 약장수’로 불렸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까지 휩쓴 최우등생이었다. 호주 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선교사를 따라 가 있던 거창에서 금지된 곡을 교회 행사 때 불렀다 하여 5일간의 감옥생활을 겪은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활기 넘치게 4년간 신학공부를 했다.

동문인 박용길 선생(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과 같이 주일학교를 인도했다. 졸업 후 29살에 송창근 목사의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국교계의 거목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들과 인연을 갖는다. 이곳에서도 공덕귀는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다시 송 목사의 제의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 4학년에 정규생으로 입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김천으로 와서 그해 8·15를 맞았다. 송 목사가 곧바로 사직을 하고 상경한 후 공덕귀는 12월29일 상경, 다음해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신학의 대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었다.

[출처] [대통령 부인들] 제4대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작성자 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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