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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교회 담임 목사이셨던 송창근 목사님과 황금동교회 성가대원들  
작성자 최경수 (122.♡.88.235) 작성일 09-05-26 21:03 조회 4,159 댓글 0
 

황금동교회 / 사진자료실

부산의 도시빈민선교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막을 내렸고,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일을 볼 수도 없게 된 송창근은 1940년 초에 경북의 김천으로 옮겨갔다. 김천 황금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김천은 경북의 한 중소도시이다.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는 땅이라 해서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이때 느닷없이 김천으로 간 계기는 황금정 교회의 강익형 장로와의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강 장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초빙했다.


  강 장로는 본래 평남 덕천 사람인데 3.1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었고, 그 후 일경의 압박과 감시가 심해서 이남으로 피신하여 처가쪽과 인연이 있는 김천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상업에 투신하여 해산물 도매업을 해서 크게 돈을 모았다. 그래서 평안도에 사는 친족 집안들도 대거 따라 내려와서 김천에 자리 잡았는데, 온 가문이 교회 일에 무척 열심이었다고 한다.


  김천에서 송창근은 생애 두 번째 목회를 시작했다. 삼십대 시절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생애 첫 목회를 할 때는 친구들이 그를 둘러쌌었는데, 사십대 시절에 김천 황금정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제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제일 먼저 옆에 온 사람은 공덕귀였다.그녀는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 4년제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정교회로 왔는데, 그 일을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뜻밖에도 졸업식에는 일본유학을 반대했던 위들스 선교사가 일본까지 건너와 축하를 해주었다. 그리고 졸업했으니 함께 일해 보자고 청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김천교회로 가기로 결정했다. 김천에 와 계시던 송창근 목사님이 교회 전도사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나 인도의 선교사로 가겠다는 말도 꺼내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니 선교사 대신 전도자가 될 수밖에… 그때 우리는 신학을 하면 으레히 교회 봉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교회에 가서 한 영혼을 꾸준히 추격해서 구원을 성취시키는 일이 신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월엔가 졸업을 하고 곧 김천교회로 갈 준비를 했다. 송목사님께서 여름 하기학교도 있고 하니 김천으로 바로 오라고 하셨다. 일단 김천으로 짐을 부쳤다. 책 외에는 별로 산 것이 없었다. 전도사로 시골을 가는데 외출이 많을 테니 비옷을 하나 사고 가위를 하나 샀다. 이것이 일본에서 한 쇼핑의 전부였다. 선물을 살 여유는 전혀 없었다.


  비옷 산 것을 알기라도 하듯 김천역에 내리니 비가 왔다. 교회 목사, 장로들이 마중을 나왔다. 강익형 장로는 내가 너무 젊다고 염려하면서도 월급 10원을 20원으로 올려 책정했다고 송목사님께서 후일 귀뜸해 주었다. 당시 시골 전도부인의 월급은 10원이 고작이었다. 이래서 나는 김천 황금동교회 정식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은 조선출이었다. 그는 동경에 유학 가서 청산학원에서 예과 3년, 신학부 본과 3년, 도합 6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에 김천으로 왔다. 그 역시 송창근의 지도를 기다려서 그가 시키는 대로 순종한 것이다. 그가 써놓은 당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내가 청산학원을 졸업했을 때 송박사님은 경북 김천읍 황금정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계셨다. 나는 편지로 나의 졸업 후의 일을 의논드렸더니, 졸업하는 대로 김천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큰 기대를 갖고 와보니 김천읍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 여려면에 산재해 있는 7개의 농촌교회 순회전도사 일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곱 교회가 연합해서 중고 자전거를 한 대 마련해 주었다. 나는 아무 불평 없이 그 일을 맡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통하게 느껴진다. 명색이 동경 유학생인데 한두 교회도 뭣할텐데 세상에 일곱 교회를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자전거에 서툴렀다. 얼마나 넘어지고, 얼마나 물에 빠지고 했는지 말로써 다 형언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애처롭기도 했다. 그래도 묵묵히 1년간 전도사 노릇을 했더니 그 다음 해에는 교회 세 개를 나눠서 다른 전도사에게 맡기고, 나는 네 교회만 맡게 되었다.

 



            김천 황금정교회 성가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송창근 목사(42세)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그 다음에 온 제자는 정대위였다. 그는 숭실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경도에 가서 동지사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 역시 졸업하자 스승인 송창근이 원하는 대로 김천 근처에 있는 예천읍 교회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정대위의 경우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일본에서 신학을 졸업한 것이 1941년 봄이었는데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 있는 한교회와 원산에 있는 다른 한 교회로부터의 초청을 모두 거절하고 만우 선생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뒤떨어진’ 지역인 경북 예천읍교회로 부임한 것은 이른바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른 그 싸움의 서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1년 봄이었다. 그때에 만우 선생은 김천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다. 그는 그의 계신 근처로 나를 부르신 것이다.


  송창근은 김천에서 행복한 목회를 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솥발처럼 벌려 서서 주위를 채우고 있는 중에 그는 본격적인 목회를 해나갔다. 다만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할 때 와서 도왔던 김정준은 뒤늦게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목회 초기에는 같이 합류하지 못했다.


  송 목사는 본래 사람을 학식의 유무나 재산의 빈부나 사회적 지위의 고하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를 본능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천의 무식한 촌로인 교인들을 대할 때도 그의 평등한 자세와 따듯한 유머가 늘 환하게 빛났다.


  송 목사는 마음 어느 한 구석에라도 “나는 미국 신학박사요, 당신들은 아무래도 무식한 이들! 나는 잘난 도회인이요, 당신들은 어쩔 수 없는 촌사람들!”하는 식의 우월감이 조금만치라도 들어 있었다면 절대로 만사가 그처럼 편편하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송 목사가 그렇게 목회해 나아가니까 황금정교회는 물론 김천 시찰 구역 전체가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과거 40년 동안 목사 한 분밖에 없었던 시찰구역인데, 송창근 목사가 김천에 간 지 3년 만에 여러 명의 목사와 여려 명의 남녀 전도사가 모여들어 함께 목회하는 큰 시찰구역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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